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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호철 소설의 상황성과 역사성
◎ 이름: shin7148 (shin7148@weppy.com)

작품세계  
이호철 소설의 상황성과 역사성
-<무너앉는 소리> 연작을 중심으로 - 작품세계 -
채 호 석 (문학평론가)  

이호철 초기 소설의 특징을 가장 잘 짚어낸 사람은 천이두이다. 천이두는 <묵계와 배신>에서 이호
철 소설의 특징을 '무우드의 미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합의가 이루
어져 있는 것 같다. 권영민도 "그의 초기 소설은 단편 소설의 양식이 추구하는 상황성의 의미를 극대
화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드의 미학을 연출하는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성격을 그에게 부
여하도록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이 지적한 것처럼 이호철의 초기 소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소설이 행위에 의해 지배되지 않
고 상황이 주는 분위기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성은 소설에서 서사를 배제한다.서사
란 행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사건이 존재하고 그 사건의 전후를 기술함으로써 비로소 서사가 이
루어진다고 한다면,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호철의 소설 속에는 서사가 없다. 이처럼 분위기를 구성하
고, 상황을 구성하는 데에서 서사는 커다란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단지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도움
을 주는 요소이거나, 아니면 객관성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장치로서만 작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호철 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부차적인 것으로 놓여 있는 서사라
고 보인다. 그리고 이 서사란, 또한 그 아래 역사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호철 소설에서의 분
위기는, 감추어진 서사=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이호철의 초기 소
설, 특히 <무너앉는 소리> 연작(그 가운데서도 <닳아지는 살들>)은, 자신이 추방한 것에 의해서만
자신을 규정할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살들>의 상황은 이렇다 : 늙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식구들이 모여 있다. 아들은 안경을 쓰고 있고,
파자마 차림으로 신문을 읽으면서 코카콜라를 마신다. 이미 오래 전부터 집에 존재하고 있지 않는 맏
딸이 밤 12시에 돌아온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 쇠붙이 소리가 들린다.
  이것이 전부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 편의 부조리극과 같다. 그야말로 앞뒤도 없고, 밑도 끝도 없는
일종의 부조리극과 같은 상황이다. 왜 맏딸을 기다리는지, 또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맏딸이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왜 굳이 12시인지도 알 수
없다. 밖으로부터, 효과음처럼 소리가 계속적으로 들려오는데,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 수도 없
다. 그저 맏딸이 온다고 하고, 사람들은 끔찍해하면서도 기다리고, 소리는 사이를 두고, 그러나 계속
해서 들린다.
  이러한 기본적인 상황 설정에는 어떠한 서사도 없다. 이 소설 속에서의 시간이란 인물의 행위에 의
해서 규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것도 아니다. 소설 속에 진
술되어 있듯이, 흐르는 시간은 이 속에서 정지한다. 오로지 흐르는 시간이란, 시계의 시침 이외의 것
은 아니다. 그럼에도 <살들>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알 수 없는 기다림과 끊임없이
들리는 '소리'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이 기다림과 소리만으로도 충분한 내적 긴장이 가능해진다.
오히려 그 기다림과 소리가 불투명한 것이기 때문에 긴장은 더욱 팽팽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러한 긴장이란,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긴장이 형식적인 것에 의해서 가능한
것일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하나의 상징, 혹은 알레고리로서 의미를 지니
게 된다. 그리고 그만큼 추상화된다.
  이러한 면모는 이보다 앞선 소설 <짙은 노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소설을 간략히 보자 : 삼
일 국민학교 뒤에 야산이 있다. 이 야산에 하릴없이 올라오는 경구라는 사람이 있다. 어느 날 남자아
이들과 여자아이들이 서로 말다툼하는 것을 본다. 남자아이는 죽여버린다고 말하고 여자아이들은 죽
여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경구가 웃으며 남자아이에게 말한다. 마지막까지 해보라고 그리고 사내아이
는 여자아이 하나를 따라가서 그 아이를 죽인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나는 "가벼운 귀염성스러움과
뭔가 시원스러움을" 느낀다. 경구라는 사내는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되었고, 그 말
을 하면서 익살맞은 미소를 띠었는데, 그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진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이 소설 속에서 주어지는 모든 정보이다. 이 밖의 다른 정보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 소설 속
에서 고유명사가 나오기는 하지만(삼일초등학교, 경구 등), 이러한 고유명사는 결코 리얼리즘 소설에
서의 고유명사, 혹은 엄밀한 의미의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실제라는 환상을 불
러일으킬 수 있을 만한 그런 표지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 속에서 고유명사는 아무런 의미
도 없다. 이처럼 소설 속에 그려진 대상이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잃어버릴 때, 소설은 이제 보편적
인 '무엇'을 대체하는 것으로 읽히게 된다. 그리고 그만큼 탈역사적 혹은 탈시간적 보편성으로서 읽히
는 것이다.
  또한 <짙은 노을>에서는 행위도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행위와 사건이 서사를 구성한다고 했을
때, 이 소설의 서사는 살인의 교사와 그에 의해 이루어지는 살인이지만, 그 살인보다 중요한 것은, 살
인을 둘러싼 대립, 의도되지 않은 살인 교사, 그리고 그에 의해 어린아이에게서 이루어지는 살인이 이
끌어내는 분위기이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살인교사자인 경구,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나의 반응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짙은 노을>에서의 살인이란, 뫼르쏘의 살인이 강한 햇빛이 비치는 백사장에서
짧은 햇빛의 번쩍거림에 의해 이루어지듯이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상황이 주는 느낌이 강조되면서, 그리고 짙어 가는 노을과 무위한 청년과 아이들의 살인이
엮어내는 분위기가 강조되면서, 실상 '살인'이라는 그 위험스러운 행위는 그야말로 사소한 것으로 떨
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소설의 배경을 지우면서 소설은 제 연관성을 상실한다. 연관성을 상실한 상황이란, 보편적인
상황으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린
아이의 살인과, 그것을 사주하고 바라보고,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자의 '익살스러운' 미소와
의 병치에서 오는 것이리라. 이를 상황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미학이
란 아무리해도 탈역사성, 혹은 탈사회성, 이러한 말이 상투적이라면, 지극히 미학적인 것은 아닐까.
그러한 미학 속에서 발견해내는 아름다움이란 또 무엇이겠는가. 이를 예술가적인 면모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미학적인 구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구성해 내고, 그리고 그 틀 안에서 세상을 이해하
는, 또 하게 하는 그러한 자세란 곧 미학주의라 이름 붙일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미학주의, 삶
의 미학화라는 것이 갖는 위험성을 우리는 이미 역사에서 보아오지 않았는가.
  <살들>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위험성을 발견한다. 사람들의 삶이 갖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삶을 처리하는 방식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특정한 삶의 방식, 삶의 고통
혹은 즐거움을, 형식 속에서 보편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들>은 <짙은 노을>과는 다르다. <살들>의 미학, 혹은 상황성을 살려내고 있는 것은 실
상 그 상황성이 부차적인 것으로 놓고 있는 역사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상황성이란 오로
지 그것이 부차화시킨 역사, 혹은 서사에 의해서만 규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 속에 역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역사의 그림자만이 존재한다. 그 그림자는 인식되기
에는 너무 작은 부분을, 그리고 그냥 지워버리기에는 너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소리> 연작의 시간적 배경은 언제인가.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시간은 5월 하순의 어느 날이다.
그 해가 어느 해인지는 모르지만, 그 5월은 1962년의 5월이거나, 아니면 작가가 말하고 있듯이 1961년
의 5월일 것이다. 만일 작가의 발언이 믿을 만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시점은 5·16 군사 쿠테타 직후이
다 .소설 속에서는 5월이 마치 지나가는 말투로 기술이 되고 있다.
  집안 전체를 통어해 나가는 줄이 끊어지면서 식모는 훨씬 자유스러워지고 활발해지고 뻔뻔해졌다.
(중략) 부석부석하게 부은 듯한 약간 얽은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얼룩덜룩한 원피스 차림으로 외
출이 잦았다. 4·19 데모나 5·16 때는 하루종일밖에 나가 있었다. 설마 데모에는 가담 안했을 터이지만
저자를 보아 가지고 들어설 때는 넓은 터전의 냄새를 거칠게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나가는 말로 언급하는 밖의 시간이란 실상은 대단히 중요하다. 식모는 '넓은 터전의 냄
새를 거칠게 풍기고 있었다.' 넓은 터전의 냄새, 4·19, 5·16이 휩쓸고 지나가는 밖은 집안의 냄새, 혹
은 공기와는 완전히 다른, 혹은 대립되고 있다. 이 밖의 냄새가 소설 속으로 들어온다. 사실 이 밖의
냄새란 밖에서 들리는 쇳소리와 다름이 없다. 4·19, 5·16으로 이러지는 역사적 소용돌이가 집밖에서
용솟음치고 있는 것이다.
  집안의 고요함과 무위함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시간과 연결됨으로써 비로서 좀더 구체적인 자리로
내려오게 된다. 이 집안이란, 단지 고요함과 무위함을 지닌 공간이 아니라, 거리의 역사로부터 고립
된 채 존재하는 집인 것이다. 이 점이 '소리' 가운데에서는 좀더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바깥은 바람이 세고 노상 소용돌이가 친다. 그러나 시간은 이 집채에 닿아서는 서서히 굼벵이 걸음을
걷다가 무참히도 정지되어 물큰물큰한 열기를 뿜는다. 시간은 그렇게 살이 찌고 부어오르고, 그리고
이 집안 사람들은 지치고, 어떤 사소한 일이건 무겁게 무겁게 감당을 해야 한다.
"바람이 세고 노상 소용돌이가" 치는 바깥이란, 실상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바로 1960년대인 것이다. 집
안은 이러한 집밖에 의해서만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소용돌이, 거친 밖의 냄새는 집안
의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또 어느 정도는 불유쾌하다. 이러한 소용돌이, 냄새는 또한 매혹적이기도 하
다. 누구에게 매혹적인가. 바로 이 집을 해체하기를 원하는 영희의 입장에서 그러하다. 영희는 집안에
서 집밖을 꿈꾼다. 그 집밖을 꿈꾸기란 물론 긍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집에 대한 부정이
라는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희는 이 집 사람들 가운데 가장
능동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능동적인 행위가 단지 선재와 실질적 '결혼'을 하는 것으로 제한되
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영희를 제외하고는 이 집 사람들 가운데 밖의 존재는 없다.
  이 집은 이 집안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세계이다. 이 집안이 외부로부터 고립되고 유폐된 공간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집안 사람들이 외부와 연관을 갖지 않을 수 있었고, 또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다. 철저하게 유폐된 공간, 세계로부터 단절된 공간으로서의 집, 이러한 유폐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
일까.
  여기서 비로소 아버지의 존재가 드러난다. 아버지는 일선에서 물러난 은행장이다. 이 집이 철저하
게 유폐된 공간일 수 있었던 것, 아니 집안 사람들이 세계로부터 물러나 집안에 칩거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버지가 갖는 힘, 경제적 힘에 의해서이다. 아버지가 지닌 경제적 힘과 권위가 무
너지기 시작하였을 때, 이 집안의 붕괴도 시작된다. 그 붕괴를 막고 있는 것은 최소한으로 남아 있는
아버지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들>에서 아버지가 끊임없이 여전히 '주인'으로서 그려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단 하나의 존재이유처럼 그려지고 있는 '기다림'을 모두 마치
자신의 기다림처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맏딸이 돌아올 수 없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아버지를 따라 맏
딸을 기다리는 것은, 가족의 해체, 아니 철저하게 고립된 왕국으로서의 집의 해체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의 기다림의 자세란, 실상은 집안의 몰락을, 그리고
이제 스스로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족 개개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유예하는 것에 지나지 않
는다.
  이러한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 스스로 주체로 서고자 하는 존재가 바로 영희이다. 영희는 한
편으로 집안의 몰락을 두려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집밖에 대해 매혹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이
다. 물론 영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스스로 자신의 밖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가
능성을 찾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선재와의 실질적인 결혼이었다.
  하지만 영희의 이러한 시도는 어느 새인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밖의 냄새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선재의 변화 때문이다. 선재는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이 집에 분위기에 적응하기 시작을 하고,
그리고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풋풋함'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집안의 분위기에 싸여 자신도
모르게 집안 사람들과 닮아 가는,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이 밖의 냄새는 밖에서 들려
오는 소리와 일정한 연관이 있다. 밖의 소리가 안의 소리로 변하였을 때, 그리고 안의 냄새가 더 이상
밖의 냄새로부터 방어될 수 없을 때, 영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선재와 결혼하고, 그리고 선재를 따
라, 밖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을 때 그 때 소설은 끝이 난다. 아니 결말로 향하여 급속도로 진
전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기다림은 또 어떤 것인가. <살들>에서 맏딸이 북으로 시집을 갔다는 것은 중요
한 사실이다. 북으로 시집간 딸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분단되어 있는 남북이 다시 합치는 방법밖에 없
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분단소설로 읽힌다. 그러나 분단의 상처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
히려 일상 속에 개재되어 있는 분단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분단은 이들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
다. 일상에 개재한 분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기다림이 그냥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구체적인
기다림이라는 점, 그리고 그 기다림을 야기한 것이 바로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 소
설에 다시 역사성이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다림이란 또 누구의 기다림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기다림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기다
림의 포즈만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기다림의 주인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그의 조연일 뿐이
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다림은 이중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아버지의 기다림은 세상으로부터 절연된
사람의 기다림이고,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한 발 물러선 사람의 기다림이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은퇴
하였고, 그리고 귀를 먹었다. 그는 <살들>에서는 여전히 주인이지만, <소리> 이후에서는 더 이상 주
인의 위치를 갖지 않는다. 아버지의 기다림은 분단에서 오지만, 그 기다림, 분단의 영향이아른 것은
이제 더 이상 커다란 의미를 갖지 않게 되고 만다. 분단은 서서히 매일의 삶에서 물러나고 있는 것이
다. 그 다음의 세대란 더 이상 기다림을 갖지 않는 세대이고, 그리고 분단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세대
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연작은 어떻게 분단이 일상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가, 그리고 어떻게 일상에
서 물러나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상에서 분단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이러
한 양상은 월남민인 작가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이 지점까지 이르러서야 선재라는 인물이 부차적인 인물에서 주요한 인물로 떠오른다. 월남민 선재.
선재는 또한 <소시민>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월남민이란 이중적인 존재이고 그리고 경계인이다. 그
들은 북에서 자발적으로 밀려난 인물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쪽에 쉽사리 정착할 수 있는 인물도
아니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존재한다. 이 이방인으로서의 월남민은 남과 북을 동시에 비
추어 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들에게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
이 이방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분단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월남민으로서의 선재는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에 철저하게 귀속된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또한 경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
다고 해서 현대 사회/남한 사회의 부정성을 벗어버릴 수 있는 새로운 주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
도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이 '선재'가 실상 소설 속에서는 그리 커다란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선재는 주동적인 인물이 아니라 이 소설 속에서는 하나의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이 소설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선재는 아버지의 기다림과 동일한 선상
에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기다림이 없다면 선재는 소설 속에서 아무런 위치를 지니지 않는다. 선재
가 월남민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선재를 이 집안에 있게 만드는 조건이다. 그리고 선재는 이들 모두
를 비추어주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이 소설 속에서 안과 밖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사람이다. 영희가 선재에게 끌
린 것이 선재가 바깥의 사람이라는 점이라고 한다면, 선재는 거꾸로 자신의 안정된 삶, 남한에서의 정
착을 위해서 영희와 관계를 갖는다. 둘 다 철저하게 계산된 것은 아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
의 결합을 상대에 대한 순수한 애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곳곳에서 이 두 인물은 자신의 선택
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그들의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차악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안에서 경계를 뚫고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영희의 욕망과 자리잡고자 하는 선재의 욕망이 만나서 얽
히는 것이다. 이 두 욕망은 서로 얽혀서 적당한 지점에서 멈춘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독립된 가정
을 꾸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집안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집안의 해체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는 유폐된 공간에서의 삶, 세상과 절연된 삶
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는 것이고, 이제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남한의 세계 속에서 그 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 세대가 가지고 있는 그 기다
림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지탱되어오던 가족의 관계가 해체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을 규정짓고 있던 분단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분리란, 실상은 영희가 꿈꾸고 있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하다. 영희는 소리를 통해서 집
안의 균열을 감지하고 있었고, 그리고 집안의 분열은 그 안에 가족간의 관계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
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로서 단지 한 집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
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재와 관계를 갖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로써 결과된 것은 결국
은 가족의 철저한 해체에 다름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집안을 유지하는 것, 아니면 이 집안을
해체하고 각자 자신의 살 길을 도모하는 것 모두 긍정성을 띠고 있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은 그
기다림으로 부정할 수 있었던 현실을 긍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리> 연작에서의 '분위기의 미학'이란 실상은 철저하게 역사적인 것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 속에서 메카니즘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분단의식의 그림자를 읽어
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작품이 드러내고 있는 역사성과 상황성의 결합, 아니 역사성에 의해서 비
로소 가능해지는 상황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이호철 소설이 지니는 고유함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남명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5-08-25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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